입체주의
입체주의는 1908년에서 1014년까지 짧은 기간에 일어난 미술운동이지만 20세기 미술에 커다란 전환점을 선사했습니다. 마티스는 조르주 브라크의 풍경화를 보고 “이것은 단지 작은 큐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이 일화에서 입체주의(Cubism)라는 용어가 발생되었습니다. 입체주의 화가는 피카소, 브라크, 레제, 그리스 등입니다.
분석적 입체주의
입체주의는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라는 두 단계를 거치며 발전했습니다. 분석적 입체주의는 1910년에서 1912년 사이에 해당되는 양식이었습니다. 분석적 입체주의는 분석된 사물의 형태를 여러 조각으로 분할해서 그것을 다시 화면에 옮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던 단계입니다.
피카소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두 점을 비교하면 이 설명을 시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1915년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작품은 정확한 데생을 통한 전형적인 초상화 작품입니다. 하지만 같은 제목의 1910년 작품(모스크바 푸쉬킨미술관 소장)을 보면 그의 얼굴과 몸, 배경은 기하학적인 파편들로 나뉘었으며 이 분할된 파편들이 화면에 재구성되면서 그의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분석적 입체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분석적 입체주의 작품들은 대상이 많은 기하학 모양의 파편으로 나뉘어 복잡한 구성을 가지지만 색상은 갈색, 녹색, 회색의 단일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단일 색조는 복잡하게 분할된 면들로 인해 대상의 가시성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일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본 관람자들은 작품의 형태와 입체감을 느끼면서 스스로 재창조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회화적 표현과의 극적인 단절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지나치게 세세하게 분석된 회화가 자신들의 본래의 작화 의도인 객관적 사실 추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정의 객관성을 갖기 위해 사용한 단일한 색채를 벗어나야 하는 필요성 또한 느끼게 되었습니다.
종합적 입체주의
그 다음 단계는 종합적 입체주의로, 1912년에서 1914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분석적 입체주의의 극단적인 추상성을 멀리하고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며 콜라주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피카소, 브라크, 후앙 그리스 등은 그림에 인쇄된 문자, 종이 조각 등을 붙여서 모티브를 조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들어본 콜라주라는 용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콜라주는 프랑스어 ‘coller(붙인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콜라주 기법은 물감, 신문지, 벽지, 패브릭 등의 레디메이드 된 재료를 결합하는 기법입니다. 이것은 회화와 실재하는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허락했습니다. 환영과 실재가 공존하여 이 둘의 구별이 모호해졌으며, 화면은 다층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악보, 신문 광고, 상품 라벨 등은 기계화 대량 생산의 산물입니다. 이처럼 대중적인 물품을 순수 회화와 결합하는 방식은 소위 고급문화로 불리던 회화와 하위문화를 결합하여 그 상하 질서를 허무는 의미도 갖습니다.
브라크의 <바이올린과 파이프>는 악기의 모양을 신문지, 종이 등을 붙여서 화면에 재현했습니다. 브라크는 입체주의의 초기 멤버였는데, 입체주의가 종합적 입체주의 단계로 들어섰을 때에는 콜라주 기법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조각난 종이 조각들을 붙여서 모티브를 구성하는 이 방식은 ‘종합적’이라는 용어에 잘 부합하는 기법인 것 같습니다. 종합적 입체주의의 콜라주 기법은 이후에 등장하는 미래주의,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다다, 초현실주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라우쉔버그, 재스퍼 존스와 같은 팝아트 작가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피카소는 종합적 입체주의에 강렬한 색채와 장식적인 형태를 도입했습니다. 피카소의 <화실(1928년)>에서 모티브들과 배경들은 모두 기하학적인 파편으로 분해되었고 각각의 색면들은 다채롭고 강한 색상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는 수평선, 수직선, 사선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작품 안의 구조물들을 서로 연결되게 하고 통합시켰습니다.
입체주의 작가들의 고민은 이렇게 분석하고 종합하고 재구성하여 제작한 그들의 작품들이 추상성을 가지면서도 그들이 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객관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를 붙이고 기하학적인 파편으로 분해하여 재구성해도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관람자가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입체주의 화가들은 다시점과 다중 면분할을 이용했습니다.
입체주의의 의의와 영향
입체주의는 분명 20세기 초기 화단에서 매우 중요한 혁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입체주의가 근본적으로 객관적 표현, 경험한 세계의 표현을 의도했다는 점은 이후의 화가들에게 제대로 이해 받지 못했습니다. 현대 화단은 입체주의를 단지 기하학적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산업화된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최적인 모더니즘으로만 인식한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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