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르느와르(Auguste Renoir, 1841-1919년)
“이 땅을 신들이 사는 낙원처럼 묘사하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다”라는 말은 르느와르가 남기고 싶은 그림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인 <물랭 드 라 갈레트의 춤(Bal du moulin de la Galette),1876년>으로 시선을 옮기면 근대의 삶도 신들의 낙원 못지않는 즐거운 곳입니다. 배경이 된 장소는 당시의 야외 술집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 장소에서 6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섭외한 모델로는 이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여 그리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르느와르의 생애
르느와르는 184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파리로 이주한 것은 그가 4세 되던 해입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르느와르는 13세 때에 도자기공장에 취업하여 그릇 위에 그림 그리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노동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린 그림 작업은 그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도자기 공장에서 색채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의 물결을 도자기 그림 작업에도 밀려왔습니다. 직장을 잃은 그는 작은 소품들을 장식하는 그림들을 그리다가 글레이르의 화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인상파 그룹을 결성한 모네, 피사로, 세잔 등과 교유했습니다. 그는 제1차부터 제3차까지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이후 1881년 르누아르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라파엘로, 폼페이 벽화 등 옛 거장들과 유물로부터 영감을 받은 후 그는 그림의 기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인상주의적인 면모를 벗어나서 다소 고전적인 기법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그는 인상파에 더 이상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표현 세계를 구축하며 원색의 대비를 사용한 화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890년대부터는 꽃, 여성상, 누드화 등을 그렸습니다.
만년에 들어선 르누아르는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은 붓과 펜을 잡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르누아르의 작품 세계
르누아르는 즐겁고 예쁜 것 만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즐겁지 않은 일들이 이미 많은데, 그림 또한 그런 것을 그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쁜 것만을 유쾌하게 그리는 화가, 르누아르는 그런 화가였습니다.
르누아르의 인상주의 작품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춤>은 그의 인상주의 작품을 대표합니다.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가 가득한 장소에서 행복한 사람들이 자연의 빛을 맞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화가를 의식하거나 이상적인 포즈를 취하지 않고 그냥 자신만의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화면의 경계에서 잘려나갔습니다. 그런 만큼 이 장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출된 것이 아닌, 삶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상주의 화법이 너무 모호하다고 생각하여 보다 확실한 화풍을 위해 인상주의를 떠났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매료된 르누아르는 근대의 삶 대신 고전 시대의 미술품과 같은 누드화를 그렸습니다. <목욕하는 여인들>을 보면 그의 인상주의 작품인 <물랭 드 라 갈레트의 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등장 인물들은 뚜렷한 윤곽선을 갖고 있고, 피부는 매끄러운 색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물들도 인상주의 작품들보다는 화가를 위해서 자연스럽지만 포즈를 취해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는 누드화를 그릴 때 주로 붉은 색 계열을 사용하여 작품 속의 등장인물에게 건강미를 선사했습니다. 그는 인상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에 선명한 윤곽선에 주목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고전 작품 속의 확실한 윤곽선과 매끄러운 색면으로 표현된 피부를 가진 인물들이 되살아났습니다.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 햇빛이 드리운 알록달록한 피부나 색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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