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Oscar-Claud Monet, 1840-1926년)
클로드 모네는 마네, 르느아르, 드가 등과 함께 인상주의의 문을 연 작가였습니다.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서 그가 가진 의미는 그의 작품인 <인상; 해돋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 제목에서 이미 ‘인상’이라는 단어를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클로드 모네는 특히 연작 시리즈로도 유명합니다. 한 곳의 장소가 시간과 빛의 변화 속에서 여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그의 연작 시리즈는 빛과 색채를 중시했던 인상주의가 무엇인지를 설명을 듣지 않고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도록 해줍니다.
모네의 일생
모네는 1840년 파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이후 항구가 있는 지역인 르 아브르(Le Havre)에서 자랐는데, 그곳에서 화가인 부댕(Eugène Boudin)과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로부터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외 작화와 외부의 빛을 표현하는 방법에 능한 작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네가 인상주의 화가로서의 기법과 예술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19세에는 파리에 있는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역시 인상주의 화가인 피사로(Camille Pissarro)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시작했지만 질병으로 군 생활을 조기에 마감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훗날 화단을 이끌어갈 다수의 화가 들와 교유하며 그림 공부를 이어 나갔습니다.
마네는 1870년에 결혼했습니다.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 지 3년 후였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에는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와 가족은 전쟁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윌리엄 터너, 컨스터블 등 당시 풍경화 작품을 보게 되었으며 자연을 표현하는 기법에 있어서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잠시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파리 외곽의 아르장퇴이유에 정착하게 됩니다. 1874년 그는 무명예술가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이 협회에는 화가 뿐만 아니라 조각가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의 첫 번째 그룹전에 모네의 작품인 <인상; 일출>이 출품되었습니다. ‘인상’이라는 단어를 갖고 있는 이 작품은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받았으며, 그는 조롱 섞인 말로 ‘인상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883년 모네는 그가 남은 평생을 지내면서 수련 연작을 제작했던 지베르니로 이주합니다. 그는 이주하기 전에 미술품 수집가의 아내였던 알리스(Alice Hoschedé)와 재혼했습니다. 그의 재혼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에르네스트 오셰데(Ernest Hoschedé)는 모네에게 작품을 의뢰하던 미술품 수집가였습니다. 그는 부유했지만 곧 파산하고 프랑스를 떠나버립니다. 그의 부인이던 알리스는 여섯 자녀와 함께 모네의 집에서 거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 모네의 첫 부인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모네와 알리스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모네는 알리스와 지베르니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892년에 알리스의 남편이었던 에르네스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모네와 알리스는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림을 통해 빛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던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시력을 거의 잃을 정도로 증상이 매우 심각해졌지만 그는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모네는 86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모네의 작품세계
확실한 윤곽선도, 매끈한 색면도 없는 인상주의는 당시 대중들에게 새로워도 너무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작품이란 창작물이기도 하지만 생계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들은 창작자에게 경제적인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886년 뉴욕의 인상주의 전시회 이후 생활이 윤택해지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주변에 도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상주의를 고수했습니다. 그의 제작 방식은 결코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빛의 순간을 잡아서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야외 제작을 요구했습니다. 추워도 더워도 그는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30개의 캔버스를 펴 놓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캔버스를 옮기면서 그 순간의 빛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물을 그리기 위해서 배를 구입하여 화실로 개조했습니다. 배 위에서도 많은 캔버스를 펼쳐 놓고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순간적으로 느낀 빛을 작은 점으로 표현했습니다. 원래 전통적으로는 다른 색의 물감들을 덧칠하면서 유화 물감으로 색상을 만들었지만 모네는 여러 색조들을 덧칠이 아닌 옆으로 나란히 찍어서 효과를 냈습니다. 이렇게 배열된 다양한 색채들은 조금 멀리서 보면 서로 섞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자를 그릴 때 사용하는 검정물감은 모네에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색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의 반점들은 실처럼 긴 모양으로 변합니다. 1900-26년에 제작된 그의 수련 연작들은 물결이나 연잎, 그림자들이 긴 실 같은 선으로 표현됩니다. 수련을 포함하여 <포풀러 나무>, <루앙 대성당>, <건초더미>의 연작이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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